공대생이 왜 디자인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어릴 때부터 수학을 참 좋아했고, 잘했던 것 같다. 수학이 재밌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에도 흥미가 생겼다. 아버지께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하시고 석사 학위까지 받으셨는데, 학문적인 부분보다는 공학적 테크닉이나 센스가 남다르셨다. 어머니께서는 생물학을 전공하셨지만 수학을 더 잘하고 좋아하셨고, 학원에서 일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나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두 분의 DNA를 골고루 잘 물려받은 덕분인지, 나는 수학을 좋아하며 취미로는 공예와 공학을 즐기는 아이로 자랐다. (부모님께서 내 꿈과 장래 희망에 간섭하신 적은 없다. 내가 디자인 대학원을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그랬다.) 그렇게 영재원을 다니고, 자연스럽게 과학고를 진학한 후 큰 고민 없이 과학기술원에 입학했다.
'디자인'을 배우고 싶습니다
22년 1월에 전역을 하고 나서 3학년 2학기 과정으로 복학을 했을 때부터 진로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때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아마도 ‘좋은 대학을 가면 다 된다’ 일거다. 그리고 실제로 대학에 오고 나서는 이전에 비해 만족도가 높은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긴 하다. 그러나 4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줄은 몰랐고, 그 4년 동안 내가 생각보다 엄청난 성과를 내지 못할 줄도 몰랐다.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내가 평생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했던 분야의 직업을 별로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눈에 보이는 작품을 만드는 것에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전자공학자는 최고의 진로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더 이상 하드웨어 위주가 아니었고, 대부분의 과정이 시뮬레이션과 계산을 바탕으로 흘러갔기에 난 재미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22년 7월에 배포한 ‘휴먼범석체’가 인기를 많이 끌게 되면서 나는 점점 디자인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디자인 전문 대학원 진학
23년도 1학기에 학교에서 융합캡스톤디자인 수업을 들으면서 교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전공하고 있는 전자공학으로 대학원을 갈 생각이 없고, 산업 디자인 계열로 취업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 때 교수님께서는 아주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셨는데, 나에게는 디자인 베이스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정말 맞는 말씀이었던 게, 디자인을 배운 경험도 없고 포트폴리오라고 해봤자 폰트 한 벌이 다였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디자인전문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추천하셨고, 홍익대학교 IDAS를 추천해 주셨다.
국내에 있는 5개 디자인전문대학원 중에서 홍익대학교와 국민대학교에 지원했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산업디자인에 가장 가까운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던 홍대 IDAS에 지원했다. 그리고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대학원 중에서 유일하게 타이포 랩이 있었던 국민대 TED에도 지원하였다. 처음에 추천을 받았던 곳도 IDAS였고, 내가 지금까지 받은 공대 교육을 활용하기 좋아보이기도 했지만 내 선택은 TED였다. 이 선택에 대해서 부모님과 마찰이 있기도 했지만 입학 후 나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고, 부모님께서도 현재는 엄청 좋아하신다.
TED 입학 1학기 후
이제 내가 TED에 입학하고 1학기가 완전히 지났다. 합격을 하고 들뜬 마음으로 상경을 하긴 했지만, 기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술이나 다른 디자인을 하다가 시각디자인으로 온 것도 아니라 공대 출신이라 아무런 베이스가 없다는 사실은 꽤나 두려웠다. 내가 수업을 따라가고 과제를 해낼 수 있을까? 잘 해오던 공대 커리큘럼을 관둔 것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까?
개강 후 첫 달은 그래도 적응하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동기나 선배들 중에서 텃세를 부리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교수님들도 내 출신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셨다. 이런 상황들에 힘입어 나는 내가 좋아하는 타이포 수업 두 개와 시각디자인 이론에 관련된 수업 하나를 정말 열심히 들었다. 타이포그래피는 몰랐던 내용들을 알아가면서 디자인을 하니 기존보다 훨씬 더 재밌어서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디자인 이론 수업은 내 뇌의 다른 부분을 사용한다는 느낌이 강했고, 가끔 그림을 그려야 할 때마다 애를 조금 먹긴 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 AI 활용에 대해서 긍정적이셨고,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만족스럽고 도움되는 답변을 해주셔서 좋았다.
사람은, 아니 적어도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 같다. 디자인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열정 없이 논문을 쓰던 23년도는 내 인생에서 정말 힘든 해였다. 그러나 그 때에 비해서 훨씬 더 바쁘고 열정을 쏟았던 24년도가 오히려 심적으로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다. 남은 3학기 동안 또 어떤 새로운 것들을 얻어갈 수 있을지 기대가 많이 되고, 현재 주어진 기회들에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